토끼와 잠수함

토끼와 잠수함

  • 자 :박범신
  • 출판사 :eBook21.com
  • 출판년 :0000-00-00
  • 공급사 :(주)북토피아 (2004-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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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원피스의 여자는 화장이 얼룩진 얼굴을 묘하게 찡그리며 손수건을 가슴으로 밀어넣어 땀을 닦았다. 제복이 서류철을 펴들다가 갈증이 나는 표정이 되어 원피스 속으로 들락날락하는 여자의 매니큐어가 발라진 손을 보았다. 그것은 마치 사우나탕에서 뜨거운 수증기 속에 몸을 담그고 고개만 내민, 소갈머리 없는 배부른 친구가 서비스걸의 탐스런 육체를 보며 입맛을 당기는 풍경과 흡사했다.



'너의 참담한 생활을 위하여 원고지를 살 몇 푼의 돈에다가 이 가당찮은 순결까지도 붙여줄 수는 있지. 그러나 더러워. 치사해. 내 눈엔 너를 그토록 착취해간 참혹한 현실이 환히 보인단 말야.'

그는 연극배우 같은 제스처와 말투를 썼다.

취한 탓인지, 연극배우 흉내를 냈으나, 더벅머리의 어조에는 울림이 있었다. 순간, 버스 속의 분위기는 더벅머리의 외침에 움찔하는 듯이 보였다. 아무도 그것에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부르릉하는 버스의 진동이 이상할 만큼 전신 깊숙이 감겨와서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공연히 콧마루가 시큰해왔다.



아침에 석상처럼 대문간에 서 있던 아내의 남산만한 배가 떠올랐다. 결혼하고 5년 동안을 한결같이 착하게만 살아온 순종적인 아내였다. 그런 아내의 몸가짐은 어려운 살림을 그저 운명이거니 하는 체념에서 비롯되었다. 사무실 낡은 의자에 앉아서도 배가 더 무겁다면서 살며시 고개를 숙이던 아내의 파리한 귓불이 자꾸 생각났다. 날씨는 찌는 듯이 더웠다. 창가에 서 있는 낡은 선풍기는, 책상 위의 종이 한 장도 움직이지 못할 만큼, 털털거리는 소리만 낼 뿐이었고 열려진 문 쪽에서도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전화가 올 때마다 괜히 등이 사려졌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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