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델랑드

루이 델랑드

  • 자 :안병호
  • 출판사 :미다스북스
  • 출판년 :2011-11-17
  • 공급사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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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동안 얻어먹을 힘조차 없는 이들을 위해 꽃동네를 설립한 오웅진 신부!

43년 동안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를 지킨 마가레트 수녀와 마리안 수녀!

49년 동안 수많은 고아와 노인들의 보호자였던 루이 델랑드 신부!



가장 낮은 곳에서 위대한 종교적 사랑을 실천한 분들입니다!!!




이 책 [아름다운 사람 루이델랑드]는 한국에서 선교와 봉사로 삶을 마친 프랑스 출신 가톨릭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다. 루이 델랑드 신부는 사제로서의 편안한 삶을 버리고 선교사의 무덤이라 불렸던 식민지 조선에 선교사로 왔다. 이후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주는 동시에 불우한 이웃을 돌보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계몽활동에 앞장섰다. 이는 조선이 바로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독립을 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델랑드 신부는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조선인 스스로 문화민족이라는 자부심을 느끼도록 했으며, 사목회를 설립, 연극 공연, 수도자 양성 등의 활동을 통해 조선인 스스로 교회를 운영하도록 하였다. 이는 자유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동시에 자율과 책임이라는 민주적 질서를 스스로 깨닫게 한 것이다. 노동자의 집, 야간 학교, 무료진료소, 무료급식소, 보육원, 양로원 등을 운영하는 등 평생 사회복지사업에도 힘썼다.





루이 델랑드 신부(한국명; 남대영)는 가톨릭 신부이기에 앞서

지난 세기 굴욕과 고통의 시기를 한국인과 함께 했던 현대사의 중요한 인물이다.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평생을 바친 그의 이야기는 앞만 보고 달려 온 우리에게

잊고 살았던 한국근현대사 뒤안의 소중한 역사를 성찰하게 한다.




루이 델랑드(한국 이름: 남대영) 신부ㆍ1895년 6월 13일 프랑스 노르망디 연안에 있는 망쉬 빠리니Parigny에서 목수인 아버지 레옹 앙리 델랑드와 유아원을 운영하던 어머니 빅토린느 프랑스와즈 르꾸띠리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전통적인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루이 델랑드 신부는 특히 신앙이 깊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베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꾸땅스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 수업을 받던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살상과 만행이 자행되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이 왜 필요한지 깨달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세계 각지에서 전교활동을 벌이던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1922년 12월 23일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1923년 6월 5일 조선에 첫 발을 내 딘 루이 델랑드 신부는 대구대교구와 부산교구의 본당에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일제 식민지 하에서 모두가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던 당시, 루이 델랑드 신부는 남다른 믿음과 사랑으로 보다 더 어려운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품에 안았다. 부산진성당에서 시작된 노동자의 집과 야간학교 등의 복지사업은 경북 영천의 용평성당에서 무료진료소, 보육원, 양로원 등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올렸고, 성모자애원을 설립하면서 꽃을 피웠다.

1935년에는 경북 영천군 화산면 용평리에 예수성심시녀회의 모체인 삼덕당(三德堂)을 설립하였다. 예수성심시녀회는 신부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을 삶의 중심으로 모실 수 있도록 지금도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65년 모든 직에서 물러난 루이 델랑드 신부는 경북 포항시 갈평리로 거처를 옮겨 마을 주민을 위한 사회복지사업을 계속 하였다. 루이 델랑드 신부는 당시 조선의 전통적인 유교 문화의 저항과 박해, 일제 식민지하의 감시과 왜곡, 해방 이후 좌우익이 극렬 대립하는 혼란과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을 한국인과 함께 몸소 체험하면서도 가장 불우한 사람들을 위한 사도직의 봉사에 헌신하였다.

1972년 10월 24일 사제 서품 50주년인 금경축을 지낸 루이 델랑드 신부는 그해 11월 17일 새벽, 77세의 생을 마치고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셨다. 한국 정부에서는 1962년 8월 15일 대한민국 문화 훈장을 수여하였고, 1969년 11월 3일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Legiond’Honneur 프랑스 최고 훈장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주요 약력

1895. 6. 13 프랑스 노르망디 빠리니 출생 1914. 9. 29 꾸땅스 대신학교 입학

1915. 2 제1차 세계대전 참전 1919. 9 전역, 꾸땅스 대신학교 복학

1921. 12 파리외방전교회 입회 1922. 12. 23 사제서품

1923. 6. 5 부산도착 1923. 12 가실성당 보좌신부

1924. 10. 5 부산진 성당 주임신부 1928. 4. 28 대구 성요셉 성당 주임신부

1934. 4. 21 경상북도 영천 용평성당 주임신부 1936. 10. 2 드망드주교 삼덕당 축성

1941. 7. 16 삼덕당 정녀들 투옥 1941. 12. 8 루이 델랑드 신부 투옥

1941. 12. 24 출옥 1969. 11. 3. 레지옹 도뢰르 훈장 수여

1972. 10. 24. 사제서품 50주년, 금경축. 1972. 11. 17. 갈평에서 선종



주요 업적

부산에서 ’성 가정의 집‘ 설립

부산에서 야간학교 ‘장미나무’ 설립

경북 영천 용평에서 무료진료소, 무료급식소 설립

경북 영천 용평에서 야간학교 설립

경북 영천 용평에서 현재 ‘예수성심시녀회’의 모체인 ‘삼덕당’ 설립

포항에서 ‘송정원’ 설립 - 성모자애원 등을 포함하는 종합복지센터 운영



가장 낮은 곳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사람ㆍ엘리트로서의 삶을 버리고 고달픈 선교사의 삶을 선택한 루이 델랑드 신부는 오로지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평생을 살아온 분이다. 외국인 선교사로서 일제와 타협하여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지만, 그는 편안한 삶을 버리고 기꺼이 조선인의 독립과 조선인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헌신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좌우의 대립에서 피해를 당하는 국민의 편이 되었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수많은 고아와 노인의 보호자가 되었다. 그는 봉사와 헌신을 필요로 하는 ‘그들’ 안에서 사는 것을 삶의 원칙으로 정했고, 그것을 실천하였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을 산 것이다.



루이 델랑드 신부 vs 오웅진 신부 vs 마가레트 수녀와 마리안 수녀ㆍ오웅진 신부는 1976년 가정과 사회에서 외면 받은 이들을 위한 공동체인 꽃마을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경기도 가평에 두 번째 꽃마을을 설립하였다. 소록도 병원에서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무작정 한국에 온 20세 초반의 마가레트 수녀와 마리안 수녀는 43년 동안 한센병 환자의 지킴이로서의 삶을 마치고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나이가 들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으니 다른 분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이 한국을 떠난 이유이다. 루이 델랑드 신부는 일제의 식민지 조선에서 백성의 어버이로, 해방 이후 불우한 이들의 보호자로 살다가 1972년 하느님의 품으로 갔다. 이들은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타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사람들이다.



믿음을 사랑으로 승화한 한국인의 아버지ㆍ델랑드 신부에게는 사랑의 향기가 진하게 묻어나오고 있다. 애써 알려하지 않아도 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 향기를 느끼게 될 것이다. 한국인에 대한 사랑의 향기 말이다. 델랑드 신부가 부산진성당에 재직할 당시 신학교에 보냈던 서정길 전 대주교는 ‘델랑드 신부님은 평생 겸손한 사랑 실천하신 분이다’라고 말했다. ‘겸손한 사랑’이란 자신을 최대한 낮추어 타인을 배려한다는 의미이다. 루이 델랑드 신부가 보여준 ‘가장 불우한 이들’에 대한 사랑이 더욱 빛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가장 낮은 위치에서 타인을 배려해주고, 타인의 아픔을 보듬어 주고, 타인의 미래까지 염두에 둔 그의 사랑은 가장 낮은 위치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같다. 이런 그의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강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봉사가 삶의 전부였던 하느님의 아들ㆍ1923년 조선에 온 이후 그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봉사’이다. 선교를 목적으로 조선에 왔지만, 그의 삶은 조선인을 위한 봉사자였다. 동료 선교사들은 ‘복지는 선교와 무관하다’며 그의 태도를 비판했지만, 델랑드 신부는 주위의 평판에 흔들리지 않았다. 『사랑의 선교사 루이 델랑드』의 저자인 시브로 올리비에 님은 델랑드 신부는 ‘가난한 이에 대한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가장 큰 영광을 구현하는’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봉사와 헌신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그들의 삶을 통째로 이해하면서 몸으로 느껴야 진정한 의미의 봉사가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아름다운 사람 루이 델랑드ㆍ‘사랑의 선교사’ ‘가난 이들의 수호자’, ‘고아들의 아버지’ 이는 루이 델랑드 신부를 칭하는 말이다. 그중에서 가장 적합한 표현은 ‘아름다운 사람 루이 델랑드’가 아닐까? 아름답다는 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혹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말이다. 가톨릭 사제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소명을 실천하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하느님의 백성들 앞에 닥친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 소명을 죽는 날까지 잊지 않았고, 실천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기 에 루이 델랑드 신부에게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말은 오히려 부족한 표현이 아닐까?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전하는 그의 메시지ㆍ1972년에 영면하신 루이 델랑드 신부가 살아있다면 오늘의 한국인에게 무슨 말을 할까?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밥은 먹었니?”와 같은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을 목전에 둔 한국과 한국인을 보며 뿌듯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쉬움도 많지 않을까? 어쩌면 지금의 한국인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을까 생각된다.

“욕심보다는 배려가 더 필요한 세상입니다.”

“간절히 원하던 독립을 쟁취한 것은 여러분의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통일을 간절히 원할 때입니다. 간절히 원하고 바라면 이루어집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곳입니다. 교회 안에 사람의 뜻을 두려 하지 마십시오.”

프랑스 출신으로 한국에 왔지만, 그 어떤 사람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한국인으로 살았던 분이었기에 아마도 지금의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름다운 사람 루이 델랑드』를 읽으면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을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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