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벼랑 끝에 서서 ‘살고 싶다’ 외치는 우리 이웃들의 고단한 삶에 관한 인터뷰다. 새벽에 출근하자마자 학교 쓰레기부터 줍는 ‘체육 코치’, 1년에 1000만 원도 되지 않는 연봉을 받으며 가족을 부양하는 ‘대학교수’, 몸을 팔 수 있으면 팔아서라도 글을 쓰고 싶은 ‘시나리오 작가’, 고대 자퇴녀가 화제가 될 때 부러움에 몸부림 친 ‘지방대 졸업생’, 연 매출 2억을 올리고도 3억의 빚에 허우적거리는 ‘농민’, 죽음의 공장에서 대학 진학의 꿈을 접은 ‘고졸 여성 노동자’, 골목 상권조차 빼앗는 SSM에 맞서 나자빠진 ‘자영업자’, 난민 아닌 난민의 삶을 살고 있는 쪽방촌의 ‘빈곤 노인’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아무리 일해도 살림살이가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수렁에 빠져드는 한국 사회 워킹푸어의 현실과 문제점을 있는 그대로 담아냈다. 삶에 희망과 빛이 사라져버린 지금, 왜곡된 현실을 ‘바로 보기’ 위해 〈프레시안〉 기자들이 이 책을 엮었다.
대통령이 공정사회 운운할 때, 사실 신뢰와 믿음보다는 의심이 더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2년 8개월 동안 보여준 지도자로서의 모습은 소통보다는 미국 쇠고기 협상, 4대강 사업 추진 등 독재자의 모습에 훨씬 가까웠기 때문이다. 어쩌면 현재 그들 권력들이 누리는 권력 다툼에 일종의 교통정리가 필요해 애먼 ‘공정사회’가 거론되지 않나 싶다. ‘똥돼지’(고위층 낙하산 자제)들로 구린내가 진동한 나머지 애초부터 국민들과는 상관없는 ‘지들의’ 생존 경쟁 규칙으로 보일 뿐이다. 국민들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구체적인 예가 있다. 바로 SSM법 처리다. 재래시장 500미터 반경 안에 기업형 슈퍼마켓의 규제(유통법)와 주변 상가들과의 조정 절차(상생법)로 요약되는 SSM법 국회 처리 과정-상정 17개월(2010년 11월) 만에 겨우 통과된 것은 물론 실효성에 의문이 많다-을 보면 공정사회 구호가 힘없고 없이 사는 사람들에겐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정이 불공정이 되고 불공정이 공정이 되는 한국 사회에서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려 ‘살고 싶다’ 외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 프레시안 기자들이 엮은 《한국의 워킹푸어》는 일할수록 더욱 가난해지는 이들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면서 우리 사회가 어떻게 왜곡되고 불공정한지 들여다보고 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 업무 상담하는 코미디 같은 현실
먼저 비정규직인 대학의 시간강사. 학력이 낮을수록 워킹푸어가 될 확률이 높은 게 전세계적인 추세지만 한국에서는 예외다. 이들은 초단시간 근로자로 전혀 공정치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 평균 연봉 1000만 원도 안 되는 고단한 현실 속에서 교수 채용은 또 다른 사회 비리를 야기하는 권력 문제로 떠오른 지 오래다. 더구나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비리를 까발렸어도 대학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처우 개선에 대한 정부의 고등교육법 개정안 역시 대학 등 이해당사자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배부른 대학은 배고픈 시간강사들의 밥그릇을 내동댕이칠 뿐이다.
동일노동임에도 임금에서 차별이 심한 곳 중의 하나가 금융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보호법에 따라 상당수 노동자가 재계약에 실패한 것에서 보듯 금융권의 정규직화는 요원해 보인다. 농협 콜센터 계약직 출신인 김현석(가명) 씨는 뼈 빠지게 일하고도 회사에서 잘렸다. 그는 헬프데스크팀에서 정규직원들의 전문 업무를 가르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회사는 그를 외면했다. 마찬가지로 금영미(가명) 씨 역시 계약직 텔러로 온갖 차별(실적요구에, 정규직의 실적 가로채기)을 받은 채 계약 만료 때 회사를 나왔다. 같은 일을 하고도 임금은 수백만 원에서 2000만 원 가까이 차이를 보였다. 이처럼 비정규직 문제로 금융권이 시끄러워지자 내세웠던 편법이 무기계약직이다. 이는 엄밀히 말해 정규직이 아니며 임금에 차별을 둔 고용안정만을 보장하겠다는 뜻이다.
임금체불에, 눈칫밥에, 자존심에, 못다 이룬 꿈
꿈을 이루기 위해 시작한 직업 보조작가. 불투명한 미래와 치열한 경쟁으로 이들은 변변한 작품도 쓰기 전에 이미 만신창이 신세다. 구상 단계의 프로젝트는 엎어지기 일쑤고, 그나마 시놉시스 작업에 받아야 할 돈은 삐약이 눈물보다도 못하다. 이마저도 절반만 받을 뿐이고. 화려한 조명 뒤에 시상식 때마다 감사하다는 말을 듣는 영화 스태프 역시 극빈의 삶을 살긴 마찬가지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놈놈놈〉)라도 제작사(바른손)는 임금체불을 밥 먹듯 하고 고발이라도 할라치면 그 바닥을 떠날 각오를 해야 한다.
비정규직 학원 코치는 자신이 맡고 있는 운동부가 해체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해야 한다. 아침마다 운동장 쓰레기를 주워야 하고, 교장의 눈치도 늘 살피며 ‘그들의’ 마음에 들게 해야 한다. 입시 때문에 학원 스포츠가 즐기는 생활 스포츠가 아닌 학업을 박탈한 엘리트 스포츠로 왜곡되어 나타나는가 하면 비뚤어진 스포츠 문화(선후배간 폭력)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와 체육 코치의 처우 개선을 담은 학교체육법안이 국회에 상정됐지만 역시나 국회는 외면했다.
지방지에 근무하는 한 기자는 월 125만 원으로 언론인의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구독률이 해마다 줄 뿐 아니라 군소신문들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 들어 대안 매체로 떠오른 인터넷 매체의 기자는 뉴스 포털 사이트를 통한 방문자 유입에 따른 대부분의 광고 수입을 올리는 경영 구조 문제로 지방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신세다.
주변부 노동자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
지하철 남자화장실에서 가끔씩 볼일 볼 때마다 깜짝 놀라는 일이 있다. 바로 청소용역 노동자로 최저임금을 받고 있는 이들이다. 화장실 청소뿐 아니라 선로 청소 일을 하기도 하는데 가끔 감전 사고도 일어난다고 한다. 고된 만큼 아픈 몸에 들어갈 치료비도 만만치 않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빚에 허덕이는 관계로 벌어도 벌어도 늘 빚의 그늘에 살고 있다. 참고로 2011년 최저임금은 시간당 4320원으로 결정됐다.
코리안드림을 꿈꾸는 이주노동자들은 온갖 멸시와 구박 속에 목숨을 담보로 일하고 있다. 월급 90만 원에 이마저도 체불당하기 일쑤고, 고용허가제로 인해 업종 변경마저 어렵다. 일본 어업노동자들의 끔직한 노동 현실을 담은 《게 공선》의 또 다른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대학 거부〉 선언을 부러운 눈으로 봐야했던 한 지방대생은 학력 차별과 학벌에 좌절하고 말았다. 비좁은 취업문에 지방대생이 들어갈 문은 어디에도 없었다. 궂은 아르바이트와 질 낮은 일자리에 대학을 중단한 어느 지방대생은 “졸업을 하더라도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고 자조했다.
굴지의 기업 삼성반도체는 죽음의 공장이 돼버렸다. 백혈병 등 희귀병으로 고졸 여성 노동자들의 대학 진학 꿈을 앗아가 버린 삼성은 산업재해를 절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막대한 치료비에 생존이 어려운 이들에게 산재는 사회보장제도임에도 삼성과 근로복지공단은 외면하고 있다. 책에는 백혈병으로 스러진 이들 노동자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생생하다. 참고로 우리나라 산업재해 사망률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억대 농부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매스컴에 오른다. 하지만 이들 역시 빚의 그늘에 늘 살고 있다. 연매출 2억에 빚이 3억이란다. 규모화에 맞춰 농정이 이루어지다 보니 부채가 늘고 물가파동 때마다 농민들은 논밭을 갈아엎는다. 최근 귀농 붐이 불고 있지만 열에 아홉은 귀농에 실패한다.
빈곤의 끝자락에 서 있는 여성 노동자들 역시 ‘살고 싶다’ 외친다. 우리나라 30대 여성의 고용률은 최저 수준인 반면 65세 이상 여성의 고용률은 최고 수준으로 비정상적 고용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죽지 말고 살아남기를 기도해야 할 뿐인 우리들
그 밖에 거리로 내몰리고 있는 ‘빈곤 아동’과 한부모 가정에서 학업중단을 맞고 있는 ‘빈곤 청소년’, 두 평 남짓한 방에서 맨밥과 김치만으로 끼니를 때우는 ‘빈곤 노인’의 이야기가 불합리한 우리 사회를 여실히 대변하고 있다. 또 높은 집값과 사교육비,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로 중산층 붕괴가 초래되고, 대기업은 골목상권마저 장악하려는 듯 자영업자 쓰러뜨리기에 골몰(SSM, 이마트 피자 등)하고 있다. 최근 신세계 정용진 부사장과 나우콤 문용식 대표의 트위터 논쟁은 대기업이 얼마나 졸렬하고 유치한(?)지, 또 상생을 저버리고 비도덕적 마인드로 회사를 경영하는지 엿볼 수 있다.
저임금 일자리의 확산과 낮은 사회복지지출, 생산의 세계화, 탈산업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워킹푸어를 증가시키는 원인임에도 우린 그저 죽지 말고 살아남기를 기도해야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