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

  • 자 :허경진
  • 출판사 :랜덤하우스코리아
  • 출판년 :2010-04-27
  • 공급사 :(주)북큐브네트웍스 (2010-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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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中心에 中人이 있었다!



조선 후기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현상들이 존재했던 시기였다. 중국의 고증학에 영향을 받은 실사구시 학풍(실학)과 천주교의 유입 및 중인 계급의 성장은, 300년 넘게 이어져온 유교적 사회 질서를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정조대왕 집권기로 대표되는 이 시기를 유럽의 르네상스나 계몽주의와도 비교하는데, 이것은 그 당시가 문화적으로 많은 시도가 행해졌던 시기였을 뿐 아니라, 근대화로 가는 중요한 가교였기 때문이다.

특히 전문직에 종사한 중인의 활약은 실로 대단했다. 당시 중인은 신분적으로 사대부 양반 계층에 훨씬 미치지 못하면서도, 평민이나 심지어 천민에게도 존중 받지 못한 경계인이었다. 그럼에도 중인 가운데는 문·사·철을 뛰어넘는 비범함으로 문예부흥과 근대화를 주도했던 인물이 여럿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의료(의원)·법률(율관)·금융(계사)·외교(역관)·천문과학(관상감)·언론(박문국) 등의 전문지식에서 미술(화원)·음악(악생·악공)·문학 등의 예술에 이르기까지, 촉망받는 모든 분야의 중심에 조선의 르네상스를 꽃피운 중인이 있었다.





좁고 지저분한 거리를 배회하던 ‘반쪽 양반’



실학자 이중환은 인문지리서 「택리지」의 서론인 ‘사민총론’에서 백성을 사(士)·농(農)·공(工)·상(商) 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옛날에는 사대부가 따로 없었고, 모두 백성(民)이었다. 백성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선비가 어질고 덕이 있으면 임금이 벼슬을 시켰고, 벼슬하지 못한 자는 농사를 짓거나 장인(匠人)이 되거나 장사꾼이 되었다.

즉, 이중환은 사·농·공·상을 신분으로 보지 않고 직업으로 보면서, “사대부라고 하여 농·공·상을 업신여기거나 농·공·상이 되었다고 사대부를 부러워한다면, 이는 모두 근본을 모르는 자들이다”라고 하였다. _385쪽 참조



그러나 이중환의 이러한 논지는 당시 신분 차별이 매우 심각했음을 방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특히 사·농·공·상으로 나눈 이중환의 분류 어디에도 중인이 속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결국 조선시대 신분 차별의 본질은 어정쩡한 경계인으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중인의 사회적 정체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 ‘반쪽 양반’이라 불리는 서얼은 육조(六曹)와 삼사(三司) 등의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금지되었기에, 대부분 역관·의원·율관·산관·화원 등의 기술직 관원이나 하급 행정 관리인 경아전과 서리에 종사했다. 서얼 출신이 기술직 관원이나 하급 행정 관리가 되면 그 후손들도 대를 이어 하급 관리에 진출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서얼 출신의 관리가 나라에 큰 공을 세워 고관으로 승진하여 양반 신분을 얻기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하급 관리로라도 가계를 이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이들도 자연스럽게 하나의 신분층을 형성하게 되면서 중인 계급을 이루게 된 것이다.

중인은 왕의 주치의인 어의, 도화서 화원, 외국에 파견되는 사신을 통역하는 역관, 호조와 형조에 근무하는 서리와 율관 등 왕실 및 조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직업적 특성 때문에, 생활 터전도 궁궐 근처에 있어야 했다.



따라서 많은 중인들이 궁궐 뒤 인왕산 기슭 굽이진 골짜기나 청개천 일대의 좁은 골목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중인을 위항인(委巷人)이라 부르게 된 것은, ‘마을 가운데 꼬불꼬불한(委) 작은 길가(巷)에 사는 사람(人)'이라는 뜻으로, 그들의 거처에 따른 것이다. _15쪽, 388쪽 참조



일과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계급의 질곡에 맞서다

중인은 비록 왕실과 사대부 양반을 보좌하거나 나라의 한직을 채우는 인물로 취급받았지만, 그들의 일과 예술에 대한 열정은 실로 대단했다. 중인은 특히 자신들이 살았던 인왕산을 배경으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 다양한 예술적 활동을 꽃피웠다. 수려한 경관으로 한양 최고의 명승지로 꼽히던 인왕산은 신분 차별과 격무에 지친 중인들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중인은 인왕산 기슭에 그들만의 서재를 꾸미고 그곳에서 문학동인이자 문화공동체인 시사(詩社)를 결성하여, 시를 지으며 한평생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시사 가운데 특히 돋보였던 모임은 서당 훈장 천수경과 출판편집인 장혼, 명필가 마성린을 주축으로 결성된 ‘송석원시사’였다. _25쪽 참조



당시 문인들이 송석원시사에 초청받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정도로 장안의 화제가 되자, 그 뒤로 직하시사, 벽오시사 등 많은 시사가 생겨나면서 조선 후기 서민문학을 주도해 나갔다.

시사에 속한 중인을 ‘위항시인’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들은 무기를 지니지 않고 흰 종이 위에 문장력을 겨룬다는 뜻인 ‘백전(白戰)’이라는 백일장을 열어 문학적 교류를 이어 갔다. 장혼이 송석원시사의 시선집 「옥계사」에 쓴 발문은 당시 중인의 끈끈한 문학적 연대를 가늠하게 한다.



장기나 바둑으로 (벗을) 사귀는 것은 하루를 가지 못하고

술과 여색으로 사귀는 것은 한 달을 가지 못하며

권세와 이익으로 사귀는 것도 한 해를 넘지 못한다.

오로지 문학으로 사귀는 것만이 영원하다. _23쪽



문학이 중인을 문화공동체로 결집시킨 과외 활동이었다면, 그림과 음악은 그들의 대표적인 직업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화원은 국내보다도 일본에서의 활약이 대단했는데, ‘달마도’로 유명한 신필(神筆) 김명국은 역관시인 홍세태와 함께 일본에 한류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당시 일본인은 조선의 문장가나 화원의 시와 그림에 광적으로 매료되었는데, 조선통신사 사절단으로 방문한 문장가와 화원은 가는 곳마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국빈 대접을 받았다. _109쪽, 275쪽 참조



당시의 화원 가운데는 돈과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붓끝을 곧추세웠던 최북 같은 인물도 있었다. 그는 그림을 강요하는 양반 고관에 맞서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찔러가며 권력과 타협하지 않은 대쪽 같은 예술가였다. _132쪽 참조



중인의 전방위 재능과 비범함은 예술 분야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그들은 탁월한 외국어 실력과 열린 사고로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는 문화 메신저였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전염병에 걸린 수많은 사람을 구해낸 용기 있는 히포크라테스였으며, 과학적 사고로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을 온몸으로 실천한 신지식인이었다.

성리학의 탁상공론에 빠져 정쟁만을 일삼던 사대부도 실천적 지식으로 무장하여 사회적 영향력이 커져가는 중인 계층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의 메이저가 인정한 진정한 메이저



이처럼 당시 양반 사회에서는 중인 계층을 천하게 여기면서도 경계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지만, 중인의 전문적 식견과 재능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몇몇 왕과 사대부는 중인의 비범한 재능과 실천적 사고를 높게 여기며 측근에 두고 교류하기도 하였다.



조선 최고의 명필 추사 김정희는 중인과 교류가 깊었던 양반 선각자이다. 서얼 출신 검서관 박제가의 제자이기도 한 추사는, 송석원시사의 좌장 천수경의 부탁으로 1미터가 넘는 화폭에 예서체로 ‘松石園’ 석 자를 써 주기도 했다. 추사는 또한 역관 오경석, 이상적, 화원 조희룡을 제자로 삼으며 친하게 지냈는데, 1840년경 제주도 유배지에 찾아온 이상적에게 그의 최고 걸작 ‘세한도’를 그려주기도 했다. _25쪽, 316쪽 참조



연암 박지원 역시 중인과 친분이 두터웠던 양반 실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실제로 연암의 소설에는 중인이 자주 등장하는데, ‘허생전’에서 가난한 양반 허생에게 밑천을 대준 변씨는 중인 출신 갑부 변승업의 조부를 모델로 한 인물이다. 연암은 요절한 천재 역관 이언적의 전기 ‘우상전’을 짓기도 했는데, 여기서 당시 일본에 파견하는 조선통신사에서 중인의 활약상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하였다. _296쪽, 370쪽 참조



일본의 관백(關白)이 새로 정권을 잡으면, (먼저 조선통신사를 초청하기 위해) 저축을 늘이고 건물을 수리하고 선박을 손질했다. 또 속국의 여러 섬을 깎아 자기 소유로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검객·서화(書畵)·문학 등 여러 분야의 재능인을 모아 훈련 시켰다. 그런 지 몇 년 뒤에야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마치 상국의 조명(詔命)을 기다리는 것같이 공손하였다.

그러면 우리 조정에서는 문신 가운데 3품 이하를 골라 삼사(三使)를 갖추어 보냈다. 이들을 수행하는 사람도 모두 말 잘하고 많이 아는 자들이었다. 천문·지리·산수·점술·의술·관상·무력에서부터 퉁소 잘 부는 사람, 술 잘 마시는 사람, 장기나 바둑을 잘 두는 사람, 말을 잘 타거나 활을 잘 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 기술로 나라 안에서 이름난 사람들을 뽑아 사절단에 포함 시켰다.

이처럼 중인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연암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그들의 탁월한 재능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중인의 재능에 대한 신뢰는 양반뿐 아니라 왕이나 왕족에게서도 엿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조이다. 정조는 당시 서얼금고법으로 인해 중인이 벼슬에 오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규장각에서 서적을 검토하고 필사하는 일을 하는 검서관직을 신설하여 서얼 출신 지식인을 등용하였다. 1779년에 임명된 초대 검서관이 바로 유득공·이덕무·박제가·서이수 네 사람이다. 당대에 가장 명망 있는 중인 출신인 이 네 명의 학자를 ‘4검서’라 불렀는데, 정조는 이들과 함께 신학문을 연구하면서 문예부흥의 초석을 쌓았다. _36쪽 참조



중인과 친분이 두터웠던 왕족 가운데는 뜻밖에도 흥선대원군이 있다. 대원군은 안동 김씨를 비롯한 권력층을 견제하기 위해 아전들에게 많은 권한을 주면서 수많은 중인 서리를 사조직으로 흡수하는, 이른바 ‘아전정치’를 폈다. 대원군은 중인을 정치적 야욕에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만큼 중인 출신 관리들의 탁월한 행정 능력을 인정했던 것이다. 대원군은 중인 출신 서리 말고도 박효관, 안민영 등의 음악인과도 가깝게 지냈는데, 인왕산 필운대에 ‘운애산방’이라는 공간을 마련해주며 가객들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박효관은 대원군의 지원에 힘입어 「가곡원류」를 편찬하여 후세에 국악을 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_34쪽, 165쪽 참조



이 밖에도 영조, 다산 정약용, 번암 채제공, 구암 허준, 겸재 정선 등 당대 최고의 인물 곁에는 항상 중인이 있었다. “인재는 인재를 알아본다.”는 말이 있듯이, 결국 시대를 이끈 주인공의 눈에는 또 다른 주인공이 들어왔던 것이다.

중인은 비록 신분의 벽에 막혀 세속적인 영예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시대를 이끈 메이저 사이에서는 중인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진정한 메이저였다.



부귀와 권력을 탐하지 않고 한평생 살맛나게 살면 ‘그만(而已)’인 삶

당시 중인 계층은 “신분에 제한 없이 실력에 따라 벼슬하게 해 달라.”며 조정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기도 했지만, 그 방법이 폭력적이거나 과격하진 않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1851년 조정에 올린 상소문을 작성한 율관 장지완이다.

상소문을 이용한 일련의 중인 통청 운동은 지금으로 치면 민변이나 시민단체들이 벌이는 인권운동과도 흡사했는데, 실제로 정조는 중인의 상소에 귀 기울여 규장각에 검서관직을 신설하기도 했다. _232쪽 참조

그러나 중인의 통청 운동은 유럽의 시민혁명 등과 같은 계급투쟁의 모습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당시 사회적으로 계급의식이나 인권 개념이 낙후되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중인 계층의 성향이 투쟁적이거나 권력지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인 대부분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능력에 비한다면 턱없이 소박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물론 태어나면서 운명에 순응하며 살 수 밖에 없는 당시의 사회 제도적인 한계 탓도 있었지만, 그러한 사회적인 불만을 범죄 등의 일탈행위를 통해 터트리기 보다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과 예술 활동으로 승화한 것이다.

인왕산을 주무대로 활동했던 위항시인이자 출판편집인 장혼이 시에 즐겨 썼던 ‘그만(而已)’이라는 표현은 당시 그들의 삶이 얼마나 관조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홀로 머물 때에는 낡은 거문고를 어루만지다 누워서 옛 책을 읽으면 그만이고,

마음 내키면 밖에 나가서 산기슭을 거닐면 그만이다.

손님이 오면 술상을 차리고 시를 읊으면 그만이고,

흥이 도도해지면 휘파람 불며 노래를 부르면 그만이다.

배가 고프면 내 밥을 먹으면 그만이고, 목이 마르면 내 우물의 물을 마시면 그만이다.

추위와 더위에 따라 내 옷을 입으면 그만이고, 해가 지면 내 집에서 쉬면 그만이다.





철저한 문헌 해석에 근거하여 풀어낸 최초의 ‘중인실록’



최근 몇 년 동안 출판에서는 물론이고, 영화나 방송 등의 다양한 채널을 통해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한 인물에 대한 조명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왕조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민초들 속에 숨겨져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찾아내 그들의 비범한 능력과 드라마틱한 삶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시도는 많은 사람에게 큰 호감을 불러 일으켰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역사 속 민초들에 대한 기록들을 모아 한권의 역사 논픽션으로 묶어 출판하면, 이를 바탕으로 흥미진진한 팩션문학이 생성되고, 또 이를 시나리오로 재구성하여 스팩터클한 미니시리즈나 영화로 제작되는 일련의 과정은, 이제 중요한 역사 콘텐츠 메이킹 시스템으로 정착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심심찮게 발생되는 역사 왜곡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즉, 주인공으로 재배치된 인물의 삶은 사료의 부족으로 인한 고증의 오류, 흥미유발을 위한 상업적 코드에 매몰되어, 치정(痴情)화 되거나 변질되고 만다. 결국 역사에 대한 다양성의 욕구가 지나쳐 역사 본연의 진실이 왜곡되어 버리는 것이다.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면서 역사 콘텐츠의 지나친 상업적 코드화를 탈피한 역사 다큐멘터리를 지향한다. 이 책은 문헌의 철저한 해석에 근거하여 다양한 역사적 지층을 하나하나 고증해 역사 본연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풀어낸다. 문헌에 나와 있는 역사적 기록을 그대로 풀어내더라도 중인의 삶은 충분히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기 때문에 그 어떤 재배치나 인위적 창작을 가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고전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저자 허경진 교수는, 조선 후기 위항문학을 연구하면서 수집한 수많은 중인 관련 기록과 문헌을 바탕으로, 이 책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이라는 이른바 ‘중인실록’을 엮어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많은 기록을 부지런히 찾아내어 정확하게 해석하고 냉정하게 고증하는 것이 역사적 글쓰기의 본령임을 제시한 것이다.

독자들은 그 어떤 재배치나 왜곡 없는, 사실 그대로의 역사 콘텐츠를 지향한 이 책의 텍스트 만으로도 인문적 소양은 물론, 중인의 곡진(曲盡)한 삶에 배어있는 드라마틱한 재미와 감동까지 충분히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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